방을 나서는 순간, 문이 조용히 닫혔다.
닫히는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귓가에는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방을 나서며 한 걸음 내디뎠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쳤고, 등 뒤에서 형들이 여전히 그 방에 남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모두가 자기 길을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길이 다를 뿐,
형들도 저마다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방에서 돌아설 때,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형들이 내 말을 비웃을 거라 예상했었다.
혹은 한심하게 여길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그런 반응을 마주하고 나니,
생각보다 쓰라렸다.
형들이 끝까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나에게 힘이 없다는 것,
그 힘 없이 이상을 논하는 건 허황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런 말들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하지만 형들 역시 틀렸다.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다고 했지만,
그 힘이 꼭 검이나 정치적인 수완이어야만 하는 걸까?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걸까?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발길이 멈췄다.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을이 보였다.
붉은 지붕,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
돌바닥 위로 분주히 움직이는 말발굽.
저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아버지가 늘 ‘백성이 곧 가문이다’라고 말했던 그들.
하지만 형들은 그들을 위해 일하기보다는,
그들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가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이 전쟁이든, 외교든.
그렇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화합이라는 건 저들 위에서 손을 뻗는 것이 아니라,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럴 방법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이 시간에 혼자 걷고 있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낮고 단단한 목소리.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에서 아버지가 서 있었다.
짙은 눈빛이 나를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은 흔들리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꾸짖음도 없었고,
나를 책망하는 말도 없었다.
마치 내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망설였다.
하지만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방으로 와라.”
책상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문서들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눈앞에 앉아 있는 아버지는 천천히 문서를 정리하며 나지막이 물었다.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세드릭?"
나는 순간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이제는 익숙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찾았지만,
하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하니,
그 생각이 너무나도 흐릿하게 느껴졌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아버지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세금 보고서,
군사 배치도,
왕실과의 서신.
그것들은 하나같이 가문을 떠받치는 중요한 것들이었다.
형들은 이런 것들을 익히며 가문을 위해 자신들의 길을 정해 나갔다.
나는 형들과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어떤 길인지 묻는다면 나는 선뜻 설명할 수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 저는 형들과 다른 길을 가고 싶습니다.”
내가 꺼낸 말에 아버지는 손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잠시 침묵한 후 물었다.
"어떤 길이냐?"
나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화합.’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돌았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람들을 하나로 모은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될까?
그게 가능했다면,
이미 세상은 변했을 것이다.
나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고민했다.
화합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을 억지로 묶어 두는 것인가?
아니면 각자의 자리를 인정하면서도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인가?
그러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와중,
아버지가 문서 한 장을 들어 올렸다.
"얼마 전, 영지 관리들이 한 보고서를 가져왔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울림이 있었다.
나는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휘트모어 가문이 세금을 낮추고,
상업을 장려한 덕분에 백성들이 한결 나아진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게 해결된 걸까?"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세금이 줄어도, 가난한 자들은 여전히 힘들어한다.
상업이 활발해졌다고 해도,
귀족들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정책을 세운다 해도,
그들 삶의 실상을 직접 겪어보지 않는다면 그 간극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나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아버지는,
내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정리하지 못하는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알고 있는 걸까?
내가 바라보는 화합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지?’
아버지는 책상 위의 문서를 손끝으로 천천히 넘겼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싶다면,
먼저 그들의 삶을 알아야 한다."
그 목소리는 낮았지만 깊게 울렸다.
나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면,
직접 경험해라."
나는 숨을 삼켰다.
아버지가 내 대신 답을 내어주고 있었다.
내가 망설이던 것을,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 경험해 보라고요?"
아버지는 손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까지 이 성 안에서 귀족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 성벽 바깥에는 너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알고 싶다면,
직접 보고 들어야 한다."
나는 말없이 아버지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나는 한 번도 이 성벽 바깥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귀족들과 함께했고,
언제나 가문의 울타리 속에서 살아왔다.
수치와 보고서,
관리들의 설명을 통해 세상을 이해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세상을 아는 것일까?
나는 정말 그들의 삶을 알고 있는 걸까?
나는,
진짜로…
이 사람들과 하나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것은 화합이었다.
그러나 화합을 논하기 전에,
나는 그들 사이에 설 자격이 있는가?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시선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경험하겠습니다.”
내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야 겨우,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